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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8-12
  • 천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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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룩주룩 비는 내려 행여나 짓궂은 날씨가 계속 되지나 않을까 다소 조마스런 마음으로, 그러나 내일은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태평화아카데미 8기 40여명의 동료들도 성지(?)를 순례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다소 상기된 모습으로 승차하는 것 같았다. 9시 30분 출발 예정이었던 버스는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그 동문이 도착한 10시에야 비로소 서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의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창밖을 바라보며 여행길에 올랐다.

비는 간간이 오락가락하다 청주 부근에 이르러 맑은 하늘을 볼 수가 있었다.

길섶에 핀 개나리와 벚꽃은 만개하여 나를 반가이 맞아주고 있는 듯 보였다. 비가 와서 행락객이 준 탓인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는 비교적 한산하여 10시에 동대문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후 3시경 목포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목포 신안비취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유달산 조각공원을 관광한 후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 중 반주로 먹은 술에 얼큰하게 취한 동료의 손에 붙들려 나이트클럽에 따라갔다. 200여 평 안의 홀은 이미 거의 가득 차 있었고 반짝이는 사이키 조명아래 무희들의 현란한 율동, 무명가수의 노래 소리가 실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관객들은 뒤질세라 온 몸을 던지듯 한 몸놀림, 무대 한 구석에선 고고풍의 노래 가락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연인끼리 부등켜 안고 흐느적거리는 광경,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는 ‘광란의 밤’ 그 자체였다.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실감케 하는 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늦은 밤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이트클럽을 찾은 많은 중년의 남녀들... 테이블에 앉아 한 컵의 맥주를 들이 키고 있는데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동료가 팔을 끄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무대로 따라 나갔다.

무대는 가관이 아니었다. 다들 취해 남정네들끼리 온 팀들은 아낙네들끼리 온 팀 옆에 살며시 다가가 은근스레 함께 춤을 추려다 배척당하고 마는 우스운 광경, 또 어떤 이는 팀 합류에 성공하였는지 배가 남산만큼 나온 육중한 몸매를 땅이 꺼져라 흔들어 대며 이 세상이 온통 제 것인 냥 무대를 주름잡는 현란한 광경, 또 다른 이는 무희들이 추는 원탁 무대 위에 총알처럼 뛰어 올라 웨이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마치 마이클잭슨이라도 되는 냥 몸을 흔들어 대는 모습 등...

나는 이러한 광경들을 쳐다보며 이곳 이야말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삶의 현장’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모든 시름 잊어버리고 발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흔들어 댈 수 있는 장소! 이 세상에는 그런 장소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임에 틀림이 없을 게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좋고, 온 몸을 흔들어 대니 전신운동이 되어서 좋고, 연인들과 함께 하니 즐거워서 좋고...

나는 내일 하의도 여행에 지장이 있을까 봐 되도록 술을 자제하며 동료가 권한 맥주 두 잔만을 들이킨 채 살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갔다.

목포 앞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11호실 방에 4명이 배정되었는데 벌써 한명은 여정이 피곤했던지 내가 들어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다.

나는 간단히 세면을 하고 양말을 세탁하여 방바닥에 펼쳐 널고서 방 한구석에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뀐 탓도 있었겠지만 더더욱 잠을 못 이루게 한 것은 하의도에 대한 설레임 때문이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고 있는데 만취된 동료가 제대로 몸도 못 가눈 채 들어왔다. 아마 새벽 1시 반쯤 되었을 게다. 이 동문이 아무데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쓰러지듯 잠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마 피로와 취기가 겹쳤나 보다. 하지만 코고는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하의도 생각에 잠겨있는데 마지막 한 명이 노크를 하지 않겠는가? 시계를 힐끔 쳐다보니 새벽 2시 40분쯤 되는 늦은 시간이었다. 이 동료 역시 옷을 훌훌 벗더니 샤워를 하고 난 후 내 옆에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자기 시작했다. 발이 내 머리 쪽을 향해서 말이다. 그대로 자다간 취한 사람의 발길에 채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동료와 나란히 누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명은 바로 눕고 나를 포함한 두 명은 거꾸로 누워 자는데 세 번째 들어 온 많이 취한 동료가 잠꼬대를 하며 제일 나중에 들어온 동료의 얼굴을 발로 밀어내는 거였다. 그러니 마지막 들어와 내 곁에서 자려던 동료가 제대로 잘 수가 있었겠는가? 발길을 피해 자꾸 내 곁으로 도망 오는 거였다. 그냥 끌어안고 잘 수도 없고... 역시 집을 나와 자면 불편하구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원래 나는 새벽까진 잠 한숨도 안자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나 한번 잠이 들면 아침에 쉬이 못 일어나는 습성인데 7시 정각이 되어 모닝콜이 울렸다. 몸은 무거웠으나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다는 기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면을 하고 8시에 아침 식사를 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신안군수의 안내를 받아 신안군 쾌속정에 몸을 실었다. 9시가 되어 배는 하의도를 향해 출발했다. 모두들 들뜬 마음에 간밤의 피로도 잊은 채 삼삼오오 갑판 위에 모여 사진도 찍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어제까지는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오늘은 우리의 방문을 축하해 주기라도 하는 듯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정말 쾌청한 날씨였다. 함께 동행한 군청 직원의 말에 의하면 올 들어 이처럼 쾌청하고 바람한 점 없는 날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

정말 물살하나 없을 정도로 바다는 고요했다. 우리 일행은 혹 배 멀미라도 할까봐 전원 멀미약을 복용했는데 기우였다.

배가 어찌나 빠른지 갑판에 서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는 다른 섬들과 푸른 바다를 쳐다보며 갑판을 떠나지 못했다.

목포에서 하의도까지는 직선거리로 34km라고 하는데 섬 사이로 헤집고 다니는 뱃길은 약 40km정도 된다고 한다. 이 쾌속정이 시속 23노트라고 하니 승용차 속도로 보면 약 시속 43km 정도로 달리고 있어 목포에서 하의도 까지는 1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본인이 자랑스러운 충무공의 후예 해군 출신이긴 하지만 군 생활 때 배를 타봤어야 뭘 좀 알지, 그 놈의 헬기만 죽어라 닦고 밀고 다녔으니 배에 대해선 귀 동냥한 것이 전부일 뿐 뭘 알아야 한마디 아는 척 할 텐데...

우리는 10시쯤 하의도에 도착했다. 이미 통보를 받아서인지 패트롤카와 봉고차 하며 자가용 몇 대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반가이 맞아주었다. 선착장에서 대통령 생가까지는 약 2km쯤 떨어져 있었다.

하의도는 끝에서 끝까지 6km, 면적은 34km², 인구는 2,7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태평화아카데미 8기 동기들과 함께. 필자 천병선 (뒷줄 오른쪽 세번째)

기대를 갖고 찾았던 김대중 대통령 고향은 그야말로 한가로운 어촌 그 자체였다. 볼 것이라고는 한가한 시골 풍경 하나 밖에 없는 속된 말로 아무것도 볼게 없는 섬이었다. 물론 매스컴을 통해 보긴 했지만 막상 가보니 너무 보잘 것 없었다. 대통령 생가는 집터만 있을 뿐 건물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단지 그 집터 위엔 유채꽃만 만발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란 푯말만 덩그런히 세워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뒷편에는 대나무 숲만 무성해 그 옛날 집터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 쓸쓸해 보였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언뜻 시상이 떠올랐다. 


 한송이 꽃을 보았네

 겨우내 혹한을 이겨내고 피어난 한 송이 꽃

 그 꽃이 아름다워 내 품에 안았네

 살포시 뜨거운 가슴으로 안았네

 그 꽃의 향기는 내 몸속 깊숙이 스며들어

 또 다른 내 마음속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으로


이곳이 세계적인 인물 ‘김대중 대통령께서 태어나신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안군수의 설명을 듣고 느낀바가 컸다. 역시 훌륭한 대통령이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신안군에서 대통령 생가 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보고를 했더니 대통령께서 사적(私的)인 문제를 어떻게 지방정부 예산으로 할 수 있느냐며 취소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안군을 책임지고 있는 군수로서는 여러 가지 복원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하시면서 서울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보여드릴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겸양의 말씀까지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리 일행은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라고 쓰여진 푯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9촌 숙질이라고 하시는 85세 할아버님의 안내로 김 대통령 고조부 묘소에 들러 참배하고 김 대통령家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배를 타고 목포로 왔다. 오는 도중 배 안에서 다과를 들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목포에 도착해 군수께서 마련한 점심을 먹고 남농 허건 화백의 기념관을 관람한 후 차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4시 30분경 전주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전주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문의 안내에 따라 조선 건국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된 ‘경기전’을 관람하고 전주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랜 다음 서울로 출발했다. 

어느덧 창밖은 어둠이 짖게 깔려 있었고 어제 비가 와서인지 고속도로는 비교적 한산하여 밤 11시경 서울에 도착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난생 처음 방문했던 추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일행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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