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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02
  • 한형동 칭다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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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너는 우주와 신들에 대해서도 깨치게 되리라." 이는 아테네 델포이 신전 현관에 새겨진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한형동 칭다오대 석좌교수

요즘 가요계의 황제 나훈아가 신곡 “테스형”을 발표하자, 소크라테스가 우리의 “국민형”이 되어 장안을 강타하고 있다. 나훈아는 신곡 가사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세상이 왜 이리 힘드냐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묻는다. 이 말은 “네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 Philosophy)의 본 뜻인 애지(愛智)에 살다 간 철학의 순교자다. 이 기회에 그의 사상과 명언을 새기며 우리의 현실을 조명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병폐인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에 반기를 들었다. <플라톤>도 중우정치의 병폐는 “대중적 인기에 집중하고 요구에 무조건 부응하는 사회적 병리현상” 이라고 했다. 우리의 민주정치는 잘 되고 있는가?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 (Forign policy)는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중은 격노한 신과 같고, 집단의지와 중우정치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국의 떠오르는 지성 <티머스 스나이더> 교수는 “민주적인 파시즘, 정의로운 포퓰리스트, 법과 절차를 지키는 독재자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실패를 잉태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고용 참사, 소득 양극화 심화, 투자 부진 등 “3대 쇼크”를 초래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케인스의 총수요 이론과 효율 임금 이론 등에 근거한다. 허나 저명 경제학 교수들은 “우리나라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는 임금이 인위적으로 인상되면 총수요는 확대되어도 기업의 비용 경쟁력 저하로 폐업이 속출한다”고 누차 경고했다. 정부는 그럼에도 강행하여 수많은 자영업자들을 거리에 나 앉도록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라고 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무지와 어설픈 앎”이 사회에 얼마나 폐해를 끼칠 수 있는지 잘 증명해주었다. 

우리 정치판은 여야가 사생결단 내듯이 매일 격돌한다. “협치”라는 말은 최고 통치자의 공허한 의전 용어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회 국감장의 진풍경은 또 어떠했나? 고성의 욕설과 폭언 속에 정책은 없고 정쟁만이 민의의 전당을 분탕질하고 있었다. 예리하고 논리적이며 참신한 정책발굴의 발언은 찾기 힘들었다. 이 뿐인가? 어떤 국회의원은 “법원이 행정부”라고 정의하는 중학생 수준만도 못한 지적수준을 자랑한 사람도 있고, 국감장에서 모바일 게임하다 들킨 의원도 나왔다. 이건희 전 삼성회장의 “우리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진단이 비 갠 후의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 소크라테스가 “정치는 무식한 다수보다 진리와 정의를 인식할 수 있는 소수의 현자들이 담당해야 한다” 고 한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지금 행정부에서는 어느 민주국가에서도 유례가 드문 집안싸움이 가관이다. “정의사회 구현과 법질서 확립”이라는 국가목표에 동참해야 할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은 불구대천지 원수(不俱戴天之怨讐)가 되어 서로를 비난한다. 희한한 일은 대통령과 여권이 공히 그 검찰총장을 두고 성역없이 수사하는 용기있는 검찰총장감이라더니, 이제 여권에서는 표변하여 그를 제거대상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거야 말로 생전 처음 경험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편, 정부가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며 평화의 파트너로 신뢰하던 북한은 비핵화는 커녕 핵역량을 강화하며, 새로 개발한 장거리 미사일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도 모자라 우리의 무고한 공무원을 해상에서 무참히 사살하고 시체를 소각했다. 우리 군은 “북한이 차마 그럴 줄 몰랐다”며, 아무런 긴급대응도 못했다. 게다가 군과 해경은 유해를 찾는다고 수십일 간 해상수색을 하는 헛발질 성의만 보였다. 아니 시체가 소각되었다는데 그 분쇄된 유골을 해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니 “세상이 왜 이래”란 말이 설득력을 더한다. 

주미 한국대사는 국감장에서 “한국은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70년간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자칫 한미동맹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는 외교적 망언이다. 외교는 방위의 최전방이고, 외교관은 국익의 첨병이다. <존 F 케네디>는 “내치의 실수는 선거에서 지면 되지만 ,외교 실수는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외교관들은 이를 깊히 새겨 언행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계는 정의에 의해 존재한다. 정의가 없다면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의 정의실현 수준은 어떤가 보자. 어느 전직 장관은 자기가 정의의 사도인양 온갖 사람을 비방하더니 도리어 자기가 위선과 파렴치의 화신임이 밝혀졌다. 그 아내는 자기 자식의 표창장을 위조한 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또 국회의원 신분인 어떤 인간은 그 가련하고 나약한 위안부 노인들을 위해 일한다는 구실로 보조금 사취와 횡령을 일삼다가 기소되었다. 이쯤 되면 테스형 말대로 이들은 피조물로서의 존재가치가 이미 상실된 게 아닌가? 

소크라테스 윤리론의 핵심은 선과 도덕에 있다. 우리의 도덕수준은 어떤가? 대통령을 꿈꾸던 지자체 수장들이 여비서 성추행 문제로 구속되고 자살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전철에서는 80대 노인이 서있어도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없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을 살해하는 반 인륜도 발생한다. ‘동양의 등불’로 칭송되던 대한민국에서 면면히 이어온 인의예지(仁義禮智)사상은 그 정체성 마저 혼미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반성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며 성찰의 미덕을 강조했다. 이제 우리도 나훈아가 절규한 “테스형” 가사의 참뜻을 통감하고,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것만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나는 신이 아테네 시민에게 보낸 등에 이다” 라고 했다. 등에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러한 등에가 되어 국가와 사회의 오류를 바로 보고 쏘면서 진충보국하는 열사가 아쉬운 싯점이다. 

<중용>에 “나라에 도가 있으면 그 말이 족히 일어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그 침묵이 족히 용납된다. (國有道 其言足以興 , 國無道 其默足以容)”라고 했다. 자유와 정의, 공정과 포용이 넘치는 정도(政道)가 정착되어 국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국가발전을 위한 창조적 직언을 마음껏 하는 시대가 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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